오준호는 강남에 와서 2층 커피숍으로 올라가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의 테이블에 앉았다. 거리에는 젊음이 넘쳐나고
있었고 수많은 젊은이들로 강남의 거리는 활기를 띠고 있었고 준호는 물끄러미 창 밖을 내려다 보았다. 쌍쌍이 팔장을 끼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들을 내려다 보면서 자신에게는 애인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어떻게 여자친구 하나 없이 그동안 황금같은 젊음을 어디에다 보냈는지 자신이 생각해도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문득 설희의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현실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여자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회장을 만날 수가 있었을까 정말 고마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설희는 어떤 여자일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궁금해진다. 그 여자가 나의 애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생각하자, 자신이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는 것을 느끼자, 갑자기 의욕이 생겨나 일루의 희망이 떠 오랐다. 회장이 자기와 면담을 했다는 것 만으로도 분명히 어떤 확신이 느껴졌으며 자신에게도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곧 생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나라를 이끄는 쌍두마차인 재벌그룹 회장과 사촌지간이 어떤 신분인데, 그리고 그의 사회적 위치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데 자기같은 일개 영업부 사원을 만나줄 만큼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닌 것이라는 것을 준호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계열사 사장들도 그 양반 앞에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달달 떨고 꼼짝을 못하건만 그런 사람이 뭐가 답답해서 자기를 만나주고 또 이야기를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준호는 자기가 제출한 서류를 그가 분명히 보았고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 되었기에 자신을 만나 준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자, 준호는 힘이 났고 어쩌면 설희와 교재를 할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리에는 어둠이 서서히 거리에 깔리기 시작했고 거리는 퇴근하는 차량들과 인도를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유흥업소와 상가의 네온사인이 현란한 색으로 환하게 점등 되어 있었고 초저녁 거리를 비추며 오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준호는 일어나서 계산을 하고 강남 뒷 골목에 자리잡고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기분이 날아갈 듯하여 오늘은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이제 회장이 서류를 보았고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 곧 돈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제 며칠 후에는 그 동안 밀린 빚을 다 갚고 친구놈들을 불러다가 코가 삐뚤어지 게 술을 사줘야지. 그리고 냉대했던 놈들 앞에서 보란 듯이 큰 소리를 치고 쏘아야지. "야! 오늘은 내가 쏘는 날이야. 아무도 지갑으로 손이 가지 말어." 자신이 외치는 모습을 상상하자 생각만해도 시원했다. 준호는 취기가 올라 중얼거리며 소주를 마시고 또 마셨다. 거리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한산해질 때까지 준호는 포장마차에 앉아 있었다. 포장마차 안에는 술꾼들이 외치는 소리로 가득찼다. 72 주머니를 톡톡 털어서 술값을 계산하고 한산해진 거리로 나와 준호는 하숙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올라탔다. 설희는 결혼한 언니 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마츄어 사진가이고 전국의 유명한 산과강을 찿아다니며 사진을 달력회사에 팔아서 생활하고 있었다. 봄이면 철쭉과 진달래를 찾아 북한산부터 제주도 유채꽃과 한라산 진달래 대피소까지가서 사진을 찍으러 전국을 찾아다니고,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진 산과 계곡과 시원하게 흐르는 강을 촬영하고, 가을이면 온산을 만산홍엽으로 물들이는 단풍과 바람에 출렁이는 억새를 찾아서 전국의 비경을 찾아다니고, 겨울에는 철새와 고니들의 모습을, 그리고 산의 설경을 찾아 설화와 상고대, 눈 속에서 서있는 고사목을 찾아 지리산으로 가서 촬영하고, 태백산의 주목을 촬영하기 위해 눈오는 날이면 태백에 가서 기다렸다가 배낭에 카메라 장비를 메고 오르며 일년내내 아름다운 비경과 경치를 찾아 다니곤 했다. 조류학자들과 함께 금강하구와 순천만 갈대 숲을 찾아 다니고 철새들이 편대를 가르며 날아가는 모습을 필름에 담아 방송국에 제공하기도 했다. 설희라는 이름도 겨울 꽃이 가장 아름답다고하여 지어준 이름이었다. 어려서는 설화라고 불렀는데 학교에 들어가서는 설희라고 고쳐 불렀다. 설화라고 부르니 옛 어른들이 기생을 부르는 것 같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그후부터 설희라고 고친 것이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거의 그렇지만 설희 아버지도 일류 사진가가 못되어 역시 가정형편이 그리 풍족한 편은 못되었다. 엄마가 맞벌이하여 설희가 대학을 나오게 뒷바라지 하였고 자라면서 아버지를 따라 산과 들 그리고 계곡을 따라 다녀서 마음이 착했고 꾸밈이 없었다. 그리고 허례허식을 싫어했고 명문대 출신답지않게 소박했다. 설희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창시절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장학금을 타기 위해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 하기도 하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여 한성그룹에서 회장 비서를 보내 달라고 했을 때 학교에서는 설희를 1순위로 추천하였던 것이다. 한성그룹 부회장인 태호도 설희 이력서를 받아 보고는 총무부장에게 바로 출근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은 아마도 자기가 젊은 날에 이상형으로 바라고 있었던 마음속의 이상형이었기 때문이었다. 태호는 중매로 결혼을 했는데 그 역시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인 한성그룹 명예회장의 명령을 따랐다고 볼 수가 있었다. 장인되는 사람은 명동에서 사채놀이를 할 만큼 숨은 재력가였으며, 그 때문에 마음속의 이상형이 아니면서도 부모의 명에 결혼한 것 이었다. 여자측에서도 한성그룹이 국내최대의 그룹인 화성그룹과 형제사이라는 사실이 아니라면 어쩌면 결혼을 시키지 않았을런지도 모랐다. 73 한성그룹 부회장인 태호는 자라면서 국내최대그룹인 화성그룹 명예회장과 회장동생인 아버지, 한성그룹 명예회장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라났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감히 맞받아 볼 수 없을 만큼 상대를 압도하는 눈초리는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흐뭇하게 하였고 " 호랑이 자식이 나왔구나" 하고 칭찬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으며 큰아버지의 신화적인 업적을 쌓았을 때의 경험담과 경영인으로서 그리고 대장으로서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과 심리등에 대해서도 현 사촌 형인 화성그룹 회장과 함께 경영수업을 받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또한 사촌지간 이면서도 친형제처럼 다정하게 어린 추억을 가지며 자랐기에 우애가 남달랐다. 태호는 결제를 내일로 미루고 화성그룹 회장을 만날 시간이 되자 인터폰으로 설희에게 말했다. "회출한다." "알았습니다." 태호는 부회장실에서 양복을 입으려고 옷걸이로 가자 설희는 태호의 양복을 들고 태호가 입는 것을 뒤에서 거들었다. 태호가 문을 나서자 설희는 태호가 엘리베이터로 향하여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등뒤를 따라간다. 엘리베이터에 다가가서는 먼저 버튼을 누르고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태호가 안으로 들어가자 설희는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다녀오세요." "응, 바로 퇴근하니 너도 퇴근 해." "네,알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내려가자 설희는 비서실로 와서 부회장실로 가서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부회장실 문을 잠갔다. 문이 닫혀 있으면 외출중이라는 표시이다. 설희는 자기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퇴근시간까지는 1시간 정도 남아있다. 설희는 보던 TIME 영문잡지를 뒤척였다. 태호는 광화문에 있는 화성그룹 사옥으로 향하고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바로 옆에 위엄스런 모습으로 비춰졌다. 바로 그 아래에는 거북선 모형이 놓여있다. 용머리를 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은 무시무시하다. 양 옆에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노를 젓는 역동적인 모습이 마치 돈벌레 다리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등에는 수 많은 창들이 뾰족하게 꽂혀있어 하늘을 나는 새들도 그 위에 앉기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74 태호는 문득 임진왜란 당시를 상상해본다. 무서운 용 입에서 불을 뿜어낸다고 생각하니 당시 치열한 전쟁장면이 생각하자 왜놈들이 얼마나 무서웠기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 바지에 오줌을 흘릴 만 한 일이라 여겨졌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 큰 아버지가 그리스의 선박왕을 찾아가서 조선소를 세울테니 배를 사달라고 한 베짱이 떠 올리자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큰 아버지도 베짱이 두둑했지만 상대인 선박왕인 오나시스의 매제인 선주도 참 대단했다고 여겨졌다. "당신네한테 그런 큰 배를 만들 기술이 없으며 또한 조선소도 없지 않소?"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큰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오백원 지폐를 꺼내어 선박왕에게 보여주었다. "이것 보시오.우리 선조는 벌써 수백년 전에 이런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만든 기술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돈이 없어 조선소를 못짓고 있을 뿐이지 배만 주문해주면 영국은행으로부터 융자를 해준다고 하니 믿고 주문을 부탁하는 바이오," 그러자 그리스 선주는 "좋소. 당신 베짱이 마음에 들었소. 우선 두척을 내 후년에까지 만들어 인도해 주시오. 자! 여기 선수금 이오." 어려서 큰 아버지로부터 동화같은 이야기를 화성그룹 회장들과 늘 들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조선소를 짓고는 또 한편으로는 영국으로부터 기술을 들여와 배와 조선기술을 동시에 이루어 놓은 역사적인 금자탑을 세운 것이라 여겨졌다. 거대한 배가 다 만들어지고 모든 사람이 과연 저 무거운 쇠가 뜰까 하고 조마조마하면서 기다리다가, 대통령이 테이프를 끊고 배가 바다 위에 뜨자, 와하! 하는 함성이 울러퍼지던 그 순간을 누구도 아마 참석한 사람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신호가 떨어지자 차는 곧 움직이고 태호는 이순신 장군상을 지나면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백의종군을 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며, 달밝은 한산도 섬에서 시름에 젖어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자 문득 오준호라는 사람이 떠 오르는 것을 웬일일까? 보니까 돈도 없는 사람 같은데 3년동안 있는 돈을 다 써가며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 은행 빚까지 얻어서 포기하지 않고, 기획서류를 작성해 가져와서, 자신에게 한 번 브리핑하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것은, 어쩌면 큰 아버지처럼 베짱이 대단한 것은 분명했다. 75 자신은 지금 확신을 가지고 국내최대그룹 회장을 이 문제로 만나러 가는 것인데 과연 형님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하지만 신가전을 설치를 해놓고 마시고 있으니 그 물맛이 어떤지는 알 것 이었다. 화성그룹 사옥에 들어서자 회장비서가 나와 맞았다. "어서 오세요. 부회장님." "응, 미스 강 , 이뻐졌군." "감사합니다. 부회장님도 더욱 건강해지신 것 같은데요?" 비서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태호도 즐거운 듯이 여비서를 보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비서는 앞장서서 세워놓은 엘리베이터로 가서 태호가 타자 함께 오르고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회장실이 있는 12층에 서자 먼저 내리고 앞장서서 회장실로 들어간다. "회장님, 한성그룹 부회장님이 오셨습니다." 태호가 뒤따라 들어가자 회장과 부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앉아." 회장인 태준은 말했다. "그래, 뭔데 그리 호들갑을 떠냐?" 부회장인 태헌이 궁금한 듯이 서둘러 물었다. "회장님, 차 뭘로 드시겠어요?" 비서가 들어와 상냥하게 물었다. "커피 가져와." "부회장님도 커피 드시겠어요?" 얼굴에 웃음을 띠운 비서가 태호를 보며 물었다. "그래, 나도." 미스 강이 뒷 걸음으로 가서는 문을 닫고 나갔다. "엄청난 사실이 있어, 형!" 태호는 자못 흥분한 듯이 말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미스 강이 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 서류봉투를 내밀며 말문을 였었다. "이게 뭐야?" 회장인 태준이 물었다. "일단 꺼내서 봐요." 옆에 있던 태헌이 말했다. 화성그룹 회장실 테이블 위에는 준호가 한성그룹 부회장실에 놓고 간 서류를 세 사람이 보고 있었다. "TAKE FIVE 라? 다섯을 잡자?" "테잌 파이브는 팝송 곡이기도 하다? 재미있군." 태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학창시절 팝송을 유난히 많이 들었고 드럼을 치면서 춤을 추고 밴드를 만들어 장발로 머리를 흔들어대며 몸을 유난히 떨었대었던 태헌이 었다. 그럴 때마다 화성그룹 명예회장은 "저 녀석들이 대가리는 왜 저렇게 기르고 다녀!" 계열사 사장들이 옆이 있을 때면 태헌이 장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못마땅해 했던 것이다. 7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