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이 엄마는 부지런히 서초동과 고여사 집을 오고 가고 있었다. 현철의 형수로부터 부탁을 받은 영남이 엄마는 고여사에게 진경이를 현철과 함께 제주도에 다녀오게 하기 위해 고여사 집에서 수다를 떨고 가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고여사님, 요즘 제주도에 신혼부부가 아주 많대요." "그렇겠죠." 고여사는 말하고 영남이 엄마를 쳐다 보았다. "진경씨를 제주도에 다녀오게 하는게 어떨까요?" "제주도에요?" "네, 제주도요" 영남이 엄마는 이미 고여사의 마음을 아는지라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결혼한 커플들은 물론이고 약혼을 하기도 전에 연인들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는 것은 이제는 하나의 관례처럼 되어버렸어요. 연인들이 팔장을 끼고 쌍쌍이 다니는 것을 봐야 진경씨도 빨리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고여사는 납득하였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니까 빨리 진경씨를 제주도에 보내세요." 영남이 엄마는 착! 달라붙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약혼도 하지 않고 어떻게 여행을 보내요? 둘이 만나서 교재를 하고 있다면 모를까." 고여사는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 고여사님. 제가 언제 신혼여행을 보내라고 했나요? 단지 바람을 쏘이라고 하는 거예요." 고여사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경이가 가려고 할까?" 고여사는 자신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고여사님께서 설득을 시켜야지요." "이따가 들어오면 말해볼께요." 고여사는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영남이 엄마는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며 말했다. "아휴, 이제 저 어른께서도 마음을 푹 놓으시겠어요." 고여사는 영남이 엄마가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키면서 말하자 사진을 보며 말했다. "그렇겠지요. 자식이 다 성장해서 혼사가 들어오는데 기쁘지 않을려고?" 고여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물끄러미 남편의 사진을 올려다 보았다. 영남이 엄마는 수다를 좀 더 떨고는 자리를 일어났다. "이제 아드님만 장가를 보내면 고여사님께서는 부러울 것이 없겠어요." 55 "경일이는 고시를 패스하고 나야 뭐 장가를 들이던가 해야지 아직은 뭐." 고여사는 아들이 판,검사가 되고 나면 그 때 훌륭한 며느리 감을 맞이하려고 염두에 둔 듯했다. "그럼요, 사법고시만 패스하면 신부감이 줄을 서게끔 제가 나서서 중매서지요. 아무런 걱정 할 것 없어요. 제가 마치 줄줄이 새끼로 묶어 논 조기처럼 줄을 여기서부터 대문 밖에까지 서있게 하지요." 고여사는 흐뭇해하며 웃으면서 영남이 엄마를 대문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고여사님, 그러기 위해서는 진경이를 빨리 시집을 보내서 경일씨 고시공부 뒷바라지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영남이 엄마는 고여사를 재촉하듯이 말하고 대문을 나섰다. 영남이 엄마를 보내고 나서 고여사는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내려놓고 먼지를 닦았다. 30대의 사진은 세월이 많이도 흘렀건만 볼 때마다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젊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여사는 사진을 보면서 남편에게 원망스런 눈길을 보낸다. 숱한 세월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기를 어언 이십년이 다 되가고 자신은 어느새 염색을 하지않고서는 외출하기가 거북할 만큼 늙어버렸건만, 그래서 사진을 볼 때마다 지나온 날들이 서러워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었다. 숱한 세월동안 얼마나 그랬을까, 잠을 자다가 옆이 허전해서 손을 어둠속에서 저어 볼 때면 그 때마다 허공을 저을 때 마음은 이루말할 수가 없이 슬픔속에서 흐느껴 울어야만 했다. 어둠은 서러움을 더욱 느끼게 하였고 늘 따뜻하게만 느껴졌던 남편이 땅 속에 있을 것을 생각하면 눈물을 샘솟듯이 나왔던 것이다. 저녁에 잠자리에라도 들어갈 때 차거운 이불이 피부에 닿을라지면 남편의 뜨거운 숨결과 몸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차디찬 땅속에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날 때마다 혼자 살아가는 여자의 슬픔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럴때면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회의가 자연히 생겼고 인생은 정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 그래서 혼자서 남편의 사진을 볼 때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사색에 잠길 때가 있었다. 자식들만 아니었다면 훌훌 털고 새처럼 날아가듯이 자유롭게 살아갈텐데...하고 생각해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독수공방이 괴로워 재혼을 하라고 주위에서 그리고 시댁에서도 말하지만 차마 그러지를 못하였다. 다정했던 연애시절을 생각하면 남편의 얼굴이 떠 올라서 도저히 그럴수가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안경을 쓰고 남자의 팔을 잡고 지팡이를 짚고 동냥을 하는 장님부부를 보고는 때로는 부러움을 느꼈고 명동성당에 가다보면 두 다리가 절단이 되고 나서도 살겠다고 찬송가를 틀고 한푼 두푼을 받아서 연명해가는 이들을 볼 때면 자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자위하게 되었다. 독수공방의 고통, 생활의 부족함에서 나오는 괴로움, 아빠없이 자라야하는 아이들의 서러움을 지켜보아야 하는 서글픔등은 직접적이 아닌 간접적인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곤 했다. 56 고여사는 문득 사진을 보며 상상해본다. ㅡ 남편은 만일 내가 먼저 죽었다면 어땠을까?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재혼을 하지않고 기나긴 밤을 홀로이 외로움과 슬픔속에 젖어 살아갈 수가 있을까? 어떻게 아이들 빨래를 하고 방청소를 하며 밥은 또 어떻게 먹일 수가 있는 것일까? 학교 갈 준비를 어떻게 해주고 아이들이 울면 과연 달랠 수가 있을까? 자기가 살아서 고통을 받고 사는 것이 훨씬 나았다고 여겨졌다. ㅡ 고여사는 한숨을 내쉬고는 사진을 벽에 다시 걸어놓고 부엌으로 갔다. 영남이 아버지는 현철이네 집에서 소작인을 하던 인부였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에 논과 밭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현철이네로부터 논과 밭을 임대하여 일년 농사를 지어 현철이네에게 김장배추와 쌀을 바치고 하며 생활해 왔던 것이다. 농사가 안되서 배추와 쌀을 수확을 못했을 때 현철이 아버지는 그 삯을 탕감해주어 영남이 아버지는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었고 자신의 동생과 아들들에게도 이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고 갚아야 한다고 늘 말했던 것이다. 영남이 엄마는 그 사실을 시집와서야 알게 되었으나 현철이네가 워낙 돈이 많아 영남이 아버지의 뜻을 동의하고 현철이 집 근처에 살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현철이 아버지가 생전에 가게를 하나 얻어주어 슈퍼를 하고 있으며 최근에 서초동 근처에 아파트를 하나 사는 바람에 돈이 궁색하여 현철이네로부터 빚을 얻어쓰고 있었으며 이번 혼사를 성사시키면 이자돈을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놓고 있었다. 빚 때문에 갚을 길이 막연하여 궁리를 한 것이 이웃에 사는 진경이를 현철이에게 중매를 주선함으로서 빚을 해결하려고 갖은 호들갑과 수다를 다 떨어서 맞선까지 보게 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영남이 아버지한테는 군대 갖다온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 광수가 있었는데 대학을 졸업하여 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었다. 대학시절에는 학생회에서 활동도 하였고 비교적 학점도 우수한 점수로 졸업하여 대기업에 취직을 해놓고 군대 갖다와서 바로 취직하여 무역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광수는 형이 강원도 평창에 있는 현철이네 선산지기로 가서 살다시피 하는 것을 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형은 스스로 자원해서 현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은혜를 그자식들에게라도 갚으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그어른이 집을 건축해서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은 것이며 그분이 선산을 샀을 때 스스로 관리인이 되겠다고 하였고 일주일에 5일은 강원도 평창에 가서 산을 지키는 것이었다. 광수는 이제 그만 그 틀에서 벗어나라고 그렇게 말해도 형은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야. 그 순리를 거역하면 곧 불행이 다가온다" 라고 말하시며 명절 때가 되면 동생을 데리고 주인 선산으로 가서 산지기로서 필요한 것을 광수에게도 가르치지만 광수는 한 귀로 듣고 그냥 흘러 듣을 뿐 이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산지기 노릇을 하느냐고 형과 형수에게 따지지만 현철이네로부터 돈을 얻어쓰고 또 가게까지 받고 있어 동생의 말을 듣지않고 있었다. 한 번은 형과 함께 추석을 맞아 미리 내려가 차례를 지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현철이가 "머슴아!"하고 부르는 것에 화가나서 " 방금 뭐라 했어요!" 하고 대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후부터 현철은 광수를 쾌심한 놈이라 생각하고 언젠가는 혼을 내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57 가뜩이나 하인같이 막 부리는 놈이 명문대학을 들어갈 때부터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광수가 대드는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마음속에 분노가 끓게 되었다. "머슴같은 새끼가! 감히 대들어. 집도 주고 슈퍼도 하게끔 차려 주었는데." 라고 말하고는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댔다. 진경은 엄마로부터 현철이네에서 만날 장소를 알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이대 앞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겠다고 영남이 엄마한테 전했지만 현철은 형의 말대로 호텔 신라에서 만나는게 어떻냐는 제의를 해놓고 있었다. 진경은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는게 불편했지만 학교 앞 카페는 주차 할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엄마의 설득에 못이겨 할 수 없이 약속을 정하고 당일로 머리도 식힐 겸 제주도에도 다녀오라는 엄마의 간곡한 설득에 날짜를 승낙하고 말았다. 진경은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가 화장을 조금이라도 하라는 성화에 못이겨 살짝 머리만 대충 만지고 집을 나서 택시를 탔다. 장위동의 북적이는 도로를 택시는 잘도 빠져나가 고대앞을 지나면서 자신이 고대를 지원할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풍스런 정경대 건물을 창밖으로 바라보았다. 해는 벌써 하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정경대의 고풍스런 시계탑 건물의 시계 바늘을 비추고 있었고 시계탑의 시계는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ㅡ 명숙이와 정희 말대로 졸업하기 전에 약혼을 해야하나? ㅡ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 진경은 어느새 자신이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오고 호텔 신라의 높이 솟은 건물이 바로 앞에 다가왔다. 택시는 호텔 정문에 멈추었다. 진경이 내리자 택시는, 기다리고 있던 손님을 태우고 붕하고 떠났다. 진경은 안으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숍으로 가자 현철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진경씨." 감색 양복을 입은 현철은 줄이 옆으로 나있는 넥타이를 매고 만족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고 있었다. 진경이 다가가자 현철은 일어나서 반갑게 맞이했다. 진경도 따라 인사하고 현철이가 안내하여 주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주문받으러 종업원이 오자 현철은 진경에게 말했다. "진경씨, 뭐로 들겠습니까?" "커피로 마시겠어요." 현철은 종업원에게 커피 두 잔을 시키고 말했다. "지난번에 집까지 태워드리려고 했는데 ..." 현철은 아쉽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괜찮아요. 힘드시게 굳이 그러실 것 까지는 없어요. 도로가 복잡해서요." 종업원이 쟁반에 차를 가지고 테이블에 내려놓고 갔다. "마셔요. 진경씨!" 현철이 말하자 진경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찻잔을 가져가 마셨다. 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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