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기 행 歷 史 記 行/독재에 시민들은...

독재투쟁을 위해 시민과 학생들은 거리로...

방형석 2010. 1. 30. 23:26

붕~이승만대통령이 가스를 내보내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부의 원조 이기붕이

기다렸다는 듯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말했다는 說...

해방직후 경제불황과 맞물려 독재와 부정선거로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날이 4월19일에 일어난 4,19 의거이다. 매년 이날에는 국가를 이끌어가는 행정,국회,사법의

대표들이 헌화를 하고 묵념을 올린다.

당시, 무차별 총격으로... 어린이, 학생 ,시민들이 낙엽이 떨어지듯 도로에 쓰러져갔다.

4월이 오면... 겨울 내내 눈 속에 떨었던 철쭉이 만개하는 시점을 즈음하여 19일이 찾아온다.

꽃향기가 짙게 감돌고 나비와 벌들이 부지런히 날아다닌다.

 

권력의 힘으로 총칼로 막고, 분노한 시민들은 물결처럼 피흘리며 쳐들어가면서

생긴 자유를 위한 값진 희생이었다.

 

첫 민주정권은 국민의 오랜 갈망 끝에 김영삼정권이 들어섰다.

북한산 아래 위치한 우이동 4,19묘지는 대대로 확장됐다.

당시 의거에 참여했던 분들이 노인이 되어 삶을 하나 둘씩 마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묘쓸 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4,19묘지 터가 좁아 우측, 사과 과수원을 매입해서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필자는 당시 암울한 시기였다.

철썩같이 약속했던 신흥 재벌2세로부터 약속을 저버리고 우이동에 있는 조그만

고시원에서 머물면서 하늘을 찌를듯이 우뚝 서 있는 북한산을 수없이 오르고,

 시간이 날 때마다 4,19국립묘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4,19국립묘지는... 나를 정신적으로 지탱해주는 교훈의 장소였다.

 

재벌의 2세는 나를 버렸으면서도 내 곁에 즉, 4,19국립묘지 근처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필자가 머물렀던 고시원 주변에 맴돌고 있는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로인해 필자는 신경성 쇠약과 불면증에서 헤어날 수 없었고, 몸은 무말랑이처럼 말라있었고, 얼굴은 중병환자처럼 누렇게 변했으며, 갸름한 얼굴 형상에 살이 없어 광대뼈는 툭  붙거져나와 있었으며 빈혈로 인해 별과 토왕성 같은 우주가 보였다.

필자는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육체적노동을 함으로서 숙면과 건강을 찾기 위해

막일을 했다.

 

그는 내주변을 세밀하게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깅 위해서 고시원주인에게 필자를 주시하라는 <주문 !>함으로서 의아심을 갖게하였고, 주인에게<도망자?> 아니면  (사기꾼?) 등 감시하는 눈길을 필자는 느끼고 있었다.

 

 나로서는 고통의 세월이었다. 대한민국에 있는 한, 재벌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는 결코 없었다.

재벌의 파워는 경제와 사회,공권력과 정보력까지 불러올 수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

이기 때문이다. 

재벌2세는 본인 뜻으로 필자에게 등을 돌린 것은 아닐 것이다.

위성재벌 2세로서 큰집인 母그룹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과 같기 

때문이다. 즉, 혈맹 <血盟>인 것이다.

그로서는 어쩔수 없이 필자를 떨어버렸지만... 그 후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으로

궁금했을 것이고, 향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발표했을 때, 그룹에 피해가 오는것이

아닐까 하는 휴우증으로 인해 필자의 생활을 엿보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당시 친구였던 외교통상부 독일대사관 일등서기관을 마치고 귀국하는 친구에게

카타로그를 부탁했다.

그는 경제협력과장으로 발령나서 종합청사 외교통상부에 근무하고 있었고,광화문 참치회집에서 만나 수년 만에 만남의 회포를 풀었다.

필자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카타로그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던, 당시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그친구를 만나고부터 이따금 나의 고시원 방에는 누군가 뒤진 흔적을 발견했다.

아마도 카타로그를 그 친구로부터 건네받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였을 것이다.

결국에는 재벌에 관계된 일에 자신이 관여해서 고시패스한 승진에 장애가 됨으로

판단한 그 친구는..... 그 이후 통화하기도 힘들고 경제협력과장직을 마치고 뉴욕 유엔대표부 참사관으로 가버렸다... 석별의 술을 나누지도 않고 ..

 

처음 재벌2세 회장실에서 만나 대화를 나눠보니 인정있는 젊은 사람같았다.

생각보다 몸은 필자처럼 작았다.

머리는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았고, 이마는 넓었다.

몸집은 작았지만 그의 눈은 커서 상대에게 위엄을 주는  눈을 소유하였다.

필자가 경인년을 맞아서 53세가 되었으니 나보다 1년 적은 돼지띠 52세일 것이다.

당시 30代 중반의 한창 나이는 사회에 일하고 꿈과 욕망을 달고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1994년도였다.

 

당시 YS정권은(김영삼 대통령)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해서 지하에 감춰져 있는

검은 돈을 밖으로 끌어내는 정책을 과감하게 시행했다.

앞으로 중국와 교역을 위해 서해안고속도로를 착공했다. 만약 서해안고속도로를

착공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정권 준비해서 임기 말 경에 착공했을 것이다.

그랬다면...그 기간만큼 중국진출과 수출이 늦어졌을 것이다.

지금 중국무역이 미국을 젖히고 최고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우려와 비난의 소리에 굴하지않고 하나회(육군사관학교 출신 장성사모임)을

 해체시켜 군의 비리를 정화하는 큰 결단을 내렸다.

통치자는...

독재가 아닌 국민이 선택한 국가관리를 위임받은 통치자는 국가경영에 정책을

발표할 때는...

내각은 물론이고, 언론과 반대표를 던졌던 국민들로부터 비난과우려와 실책이

예상된다는 등등... 說...들이 난무해왔다.

그것은 역사의 사실(事實)이 기록되어 있다.   왕조시대서부터...!

 

민주화정권의 첫 탄생이기도 했던 정권이지만...

외화부족으로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500억달러를 빌려오는 조건으로 금융신탁이라는 굴욕적인 통제를 받아야 했던, 국가적 시련을 맞았다.

500억달러를 차관을 받고 김대중정권에게 민주정권은 이어졌다.

우리가 IMF로부터 차관받은 5백억달러를, 그후 국민들은 ..소위 유학여행과 해외

여행으로 10년전에 치욕을 받았으면서도, 언제그랬느냐는 듯이... 지난 2008년도

에는  여행적자로 경제통치를 받았던 5백억달러를 훌쩍 추월했다.  

 4,19 국립묘지에서 바라본 삼각산의 만경봉, 백운대

북한산이라는 이름은 일본이 한국통치를 하면서 북한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지었다 했다.

백운대 우측에 인수봉이 있는데 이 세 준봉을 함께 있다고 해서 지어졌다고 했다.

삼각산이 우리 옛 이름이다.

위성재벌2세와 만난지 만 16년이 지났다.

필자는 삼각산과 오봉,도봉산의 웅장한 걸작품을 늘 가까이 접하면서 신의 능력에 감동받았다. 

4,19묘지 벤치에 앉아 있으면 북한산의 자연의 걸작품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비가 내리면 물안개를 몰고 휘몰아치는 백운대와 인수봉,만경대를 보며 어떻게

세월에 흔들리지 않고 풍우(風雨)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을까.

인간이 만든 초고층빌딩도 100년을 풍우에 버티지 못하는데 천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거대함에 감동받았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넘실대는 검푸른 물결 위로 붉은 기둥을 세우며 해가 솟는 장면에 감동받듯이...기암괴석 대자연의 장엄함을 느끼게 하였다.

 도봉산 아래에서 올려다 본 선인봉,만장봉,자운봉. 왼쪽부터

깎아지른 절벽 있는 왼쪽이 선인봉이다.

암벽하는 벗들과 함께 주말에 텐트를 치고 자일을 몸에 감고 오르던 곳이다.

조그만 틈새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암벽화로 수직의 바위 벽에 붙어 뜨거운 태양의 햇빛을 등 뒤로 받으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기어오르던 시절이 있던 추억의 선인봉이다. 남들은 돈과 사회적 지식과 지위를 얻기 위해 바쁘게 생활했지만, 필자는..

오직, 건강 만을 찾기 위해 노동과 정신적으로 버티기 위해 모든 것을 다바쳤다.

<4,19 국립묘지 뒤로 오르는 진달래능선에서 본 도봉산 전경.

눈이 바람에 날려서 시야가 흐릿했다.>

도봉산의 기암절벽의 대자연 장엄함을 마음에  늘 두었다.    

고뇌하던 필자는 슬픔과 번뇌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건강을 위해 북한산을

스승과  벗삼아 혼자 산행을 했었다. 나는 선택된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에 있는 오봉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창조주의 걸작품이다.

백년동안 멈추지 않고 성장하는 기업이 몇개나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야 만이 북한,오봉,도봉산처럼 영원한 걸작과 같은 프로젝트(project)를

만드는데 고심에 고심했다.

모든 악조건에서 눈감으며 잠을 청할때에도...눈을 뜨고 장엄한 세곳의 명산을

보면서 늘 프로젝트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열정과 신념으로 몰두했다. 마치 고시공부하는 일념(一念)으로...

 

 

 IMF로부터 치욕의 경제통치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실업자는 급증했고, 서민들 마음 속에는 불안의 그늘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슈퍼에 오가는 사람들도 근심으로 어둡고 무거운 말로 소식을 주고 받았다.

강북구청에서 일자리를 풀었다. 하천청소와 길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와 가래침,휴지 등 각종 오물을 청소하는 일당 인부모집 창구에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다.

필자도 하천청소를 하고 바로 저 조각상 뒤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함께 펼쳐놓고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강북구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4,19국립묘지 확장한 것을 보며 한결같이 말했다.

"김영삼이가 이것 하나 잘했어."

그후,IMF가 터지자, 국민들은 김영삼정권을 원망했다.

"정부는 나라경제가 이지경이 되도록 무엇했는가? "

치욕은 한번으로 족해야 한다. <다시는 굴욕적인 경제통치는 받아서는 안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하늘을 뚫을 듯이 장엄하게 위엄을 보이며 솟아있는 삼각산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나라가 저기 세 준봉처럼 자연의 위대함처럼 국력이 강했으면 하고 소원했다.

 역사는... 오랜 과거史 만이 역사는 아닌 것이다.

잊을 수 없고, 또 잊혀져서는 절대로 안되는 지나온 사건들의 시공을 되새기며

현재와 그리고 미래의 나아갈 방향을 찾는데 매우 중요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국가경영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대통령은, 약속과 실행할 것을 공언한 대로

자유,민주,정의를 실현하고 지켜야 한다. 

 지나온 16년 동안 정권이 4번째 들어서면서 매년 4,19의거 기념일이 되면...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거리로 뛰어나와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그 날 !

많은 시민과 학생, 구경나온 어린아이까지 ...

그리고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삼부요인<입법,사법,행정>대표들이 다녀가도 나에게는 봄이 오지 않았다.

정권을 이어받은 통치권자가 매년 16번을 와서 향을 피우고 고인들의 영정 앞에

향을 피우는 참배하는 것을 봤지만, 내게는... 결코 봄이 오지 않았다.

 

대통령으로서도 골머리가 아플 것이리라.

거대공룡 재벌과 대북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두 집단에 대통령도 수술할

용기를 내놓지 못했던 것은 임기동안  시달릴 것이며, 자신의 업적을 이룰 수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도덕성을 던져버리고 오직, 자신들의 이익 만을 위해 16년을 은폐해왔으며, 국익을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사리사욕 만을 위해서는 끝도 없는 시간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나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쓰러져 거리에 나뒹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분없는 죽음을 맞이한 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서 건강을 위한 몸부림이 긴 세월

동안 지속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분노의 머리결을 흩날리며 거리로 뛰어나온 모습을 표현한조각상 !

 필자가 유치원 나이 시절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는 군인들이 긴 M1 소총을 허리에 총대를 세우고 출입을 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린 나에게 그 모습은 너무도 이상했다. 그러나 지금도 기억이 너무도 생생했다.

잘은 모르지만 대학생들이 독재에 항거하기 때문에 거리로 뛰어나와 선동할 것을

막기 위해 군인들이 정문 출입을 감시하고 있던 것을 청년이 되어서 알았다.

민주를 위한 독재정치 항쟁했던 대학생들을 상징한 조각품이다.

문득 생각해본다.

<요즘 대학생들이 희노애락을 벗어버리고 지금 60代 분들처럼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누구나 좋은 것, 맛있는 것, 지식인, 사회적지위, 교수, 고급공무원 등 욕망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모른체하고 관망하면서 살아가고 결혼해서 아들,딸을 낳고 사회적으로 지위를 얻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들은 삶을 포기하며 거리로 뛰어나와 독재항쟁을 해야 했는가?

용기를 드러낸다고 해서 돈이 나오나 아니면 쌀이라도 쏟아진다냐?

세상사람들이라도 알아주기라도 한다냐?

고통과 피를 흘리고, 가족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어야 했단 말인가.

 국가는 일부 못된 뿔을 가진 정치가들로 인해 희생된 국민에게 무엇으로 보상

하려는가 ?

쥐꼬리 같은 돈으로 그것도 보상이라고 자조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다.

필자는...

 이 묘지를 보면서...

필자도 언제인지는 몇살로 삶을 마치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도 이곳에 묻히는

영광이 주어질 것인가 하고 생각도 했다.

 눈덮인 봉안소에는 슬픈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매서운 추위에 카메라가 얼음처럼 냉기가 손가락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져왔다.

 

 안소에서 4,19국립묘지 전경을 보았다.

 

 당시 학생교복이다.

필자도 같은 모습의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고, 중학교 진학할 때에는 추첨으로

입학했다.

당시 필자보다 한 살 위 닭띠까지는 입학시험을 중학교부터 입시로 들어갔지만,

필자부터 추첨으로 학교가 선정되어 공부못하는 필자는 신이 났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은...

박정희대통령 아들 지만군이 공부를 못해서 박정희대통령이 추첨을 하라는 명령

이었다는 說...說이다. 

과연 그런가?   <우리나라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 >

 

 

 가족을 잃은.. 슬픔은 남아 살아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어찌 알겠는가?

 

 

 언제나 읽어도 글이 이처럼 애절한 심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글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를 깨우쳐주었다.

 

 

 4月이 오면... 짙은 철쭉이 만개하여 님의 벗이 되어 향기를 전한다.

겨울에는 주목이 <살아 천년 죽어서도 천년>인 주목이 영원한 푸르름을 남기다

희생한 넋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군인과 시민이 충돌해 싸우는 조각품이다.

 

 

 

 우이동 4,19국립묘지 위에는 이처럼 나라를 걱정하며 삶을 마친 독립운동가 묘가

많았다.

이준열사 묘 또한 우이동 아카데미호텔 근처에 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가서 칼로 배를 갈라 창자를 내놓고 독립지지를 호소했던 역사적 사실은 영원히 기억될 처절함이다.

지나고 난 지금 모든 것은 흐르는 세월 속에 묻혀지고 세인들 기억 속에 잊혀져만

간다.

필자도 삶을 마감하고 세월이 흐르고 난 뒤, 남긴 흔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젖혀져서 알려지지 않고 삶을 마감한 많은 사람들처럼 ...

잊혀질 것이다.

재벌의 도덕성에 의해서...

 모진 찬바람과 비와 비구름이 지나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기암처럼...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 시련이 가로막더라고 우뚝서서 영원히 빛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