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9월 초순이 찾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있으니 바로 봉평이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면온과 장평 사이에 있는 이효석 고향에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무자년에는 추석이 예년보다 한 달 정도 일찍 찾아와 여름휴가를 다녀온지 얼마되지
않아 관광객은 적었던 것이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 단편소설 < 메밀꽃 필 무렵 > 중에서)
필자는 면온 I C로 나와 보광휘닉스 스키장이 있는 도로로 나아갔다.
태양은 어김없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워터파크를 개장한 보광을 지나 무이예술관을 찾았다.
무이예술관은... 초등학교가 폐교가 되어 조각,서예,유화 등 작가들이 함께
창작하는 아트였다.
학교 담 밖으로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하얗게 피어 반겨주었다.
6년 만에 찾아온 나를...
산과 어우러진 메밀꽃은 햇빛에 반사하여 눈부셨다. 신선한 맑은 공기에 꽃들의
향연에 취한 나는 황홀! 그 자체였다.
문학이 뭔지 몰랐던 초등학교 시절, <소나기,메밀꽃 필무렵>을 알게되었다.
풋풋한 소년,소년이 비를 피하기 위해 함께 느낀 야릇한 기분을
40년이 지난 아득한 추억을 되살린다.
추억은 천금<千金>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재산이다.
어떻게 돈으로 살 수 있겠는가. 인생에 한 번 뿐인 소년시절의 소중한 시간을...
학교 교정에는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밴드에서는 흘러간 음악이 흐르고 있어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예술의 영원함을 주었다. 파란 하늘 아래...
한 때 초등학교 교정이다. 지금은 예술작품들이 그림,서예,도자기가 전시되었다.
저녁이 오고, 또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을 때도 작품의 혼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학교 건물 내에는 많은 그림과 서예,도자기가 전시되어 있다.
파란 하늘 아래 녹음이 우거진 산. 무이예술관은 지켜질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무이예술관을 처음 방문한 후,6년이 지났다.
순탄지 않았음에 분명함음을 나타내는 듯 필자 얼굴이 경직되었다.
마치 석고상처럼...
지나온 6년은 또다른 긴 인고의 세월이었고, 고통이 뒤따르는 시간이었다.
지나온 14년 중에서 최근의 6년 세월은 한편의 영화 같은 클라이막스였다.
기억을 떠올리면, 한 장면 그리고 또다른 면이 겹쳐 오버랩이 되었다.
계속 이어져서 화면이 바뀌었다. 그것은 파노라마였다 !
관리할 인력이 부족했을까.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하다.
조물주는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했다.
무이예술관을 뒤로 하고 봉평 이효석 문학관으로 이동했다.
이곳이 "메밀꽃 필 무렵" 무대이다.
전국에 서는 장날에 장사해서 먹고 사는 장동뱅이는 이곳 봉평에 장이 서는 날에 맞춰 왔다.
가을 하늘에는 달이 환하게 비추고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이 소슬한 산바람에 흐느적거리며 기울인다.
장돌뱅이는 주막집 허드렛일하는 처녀를 꼬뜨겨 메밀꽃 밭으로 나오게 하는데 성공했다.
처녀는 어스름한 달빛에 비추는 화려한 메밀꽃과 향기에 취해 장돌뱅이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줄도
모르고 물레방아 물소리를 들으며 꽃길을 걸었다.달은 어느덧 보름달이 되어 사위를 환하게 비추었다.
바람이 쏴~ 불어오자, 메밀꽃은 일제히 옆으로 출렁이는 파도처럼 흔들렸다. 그 황홀함이란...
장돌뱅이는 달이 원망스러웠다. 빨리 구름이 차야 치마를 벗길텐데...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오늘 같이 황홀한 날에는 백이면 백 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장돌뱅이는 알고 있다 하지만
저렇게 달이 밝아서야 원...쯧...
장돌뱅이에 이끌려 따라온 숫처녀는 시원한 산줄기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눕는
메밀꽃의 향연에 취해 황홀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정신이 없다.
이윽고 구름이 달을 가리기 시작했다.
옮거니... 장돌뱅이는 기회가 이때다 싶었다. 구름이 달을 막 가리려는 그 짧은 사이 장돌뱅이는
왼손을 처녀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처녀의 몸을 자신의 상체로 당기고 하얀 빛을 발하는 메밀꽃을
카페트 삼아 처녀를 꽃술에 누였다.
그리고 재빨리 다음 단계로 손을 넣었다. 처녀는 신음을 발하고는 마치 물고기처럼 몸에 탄력을 넣었다.
장돌뱅이는 허리에 감던 왼손을 어깨를 지긋이 누르고 눈길을 마주하고 얼굴을 가까이 다가가 입술을
포갰다.
오른손은 치마 속으로 하얀 허벅지를 타고 안으로 안으로 내달았다. 이윽고 원시림을 가린 속옷을 벗기고 원시림을 덮었다.
순간, 처녀는 신음을 하며 경직됐던 하체가 마치라도 된 듯 힘이 빠져나갔다.
하얀 메밀꽃과 처녀의 하얀 허벅지는 구름에서 벗어난 환한 달빛에 하얗게 빛났다.
소슬한 바람은 메밀꽃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어느덧 두사람은 바람에 휘날리는 메밀꽃 숲 속에서 하나가 되어 메밀꽃을 흔들어 놓았으나 바람에 가려 알길이 없었다. 물레방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두사람의
가쁜 숨소리를 삼켰다.
이튿날 장에 가기 위해 장돌뱅이는 곤히 자는 만리장성 쌓은 아가씨에게 들킬새라 발꿈치를 들고 소리내지 않게 하려고 애쓰면서 주막을 나섰다.
일행을 따라가면서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를 돌아다보며 처녀가 잠자는 주막을 돌아다 보았다.
그 후 몇년이 흘렀을까. 아득하게 잊혀지도록 팔도를 돌아다니며 살아온 장돌뱅이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봉평에 왔던 것이다.
그 옛날 주막은 있었다. 그러나 주모는 보이지 않고 낯이 익은 듯한 여인이 장사하고 있다. 그리고 열댓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 아직 청년이 되기에는 이른 소년이 옆에서 도와주고 있다. 아들인가 뵈지...
술에 취해 아득한 지나온 세월, 추억에 젖어 술을 마시는 장돌뱅이. 내일이면 장을 여는 마을로
떠나야 했다.
그때 주모가 문을 삐꼼이 열고 물었다.
"손님, 내일 떠나나요?"
주모도 웬지 저 남자가 낯이 익은 듯 했지만 통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황홀한 메밀꽃에 취해 그럴법도 했다.
"그래야재, 뭐 부탁할 것이라도 있소? 소용없스다. 남쪽으로 내려가니까."
"그게 아니고 내 아들도 데려가서 장사하는 것 가르치시요."
"장사? 아직 어린데..."
"그래도 힘은 장사랍니다. 빨리 장사를 가르쳐야 할텐데..."
주모는 걱정되는지 말끝을 흐렸다.
장돌뱅이는 잠시 달을 보며 생각했다. 그 때 메밀꽃에서 사랑을 나눴는데 자신이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았더라면 자식을 가졌을 테고 지금 쯤은 주모 아들 나이가 됐을텐데...
장돌뱅이는 생각에 잠겼다.. 잠시 그리고 고개를 들고 주모를 보고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것이니 준비를 시키시요."
이튿날, 달이 기우는 새벽에 어둠을 부스럭거리며 짐을 챙겨나오니 젊은이가 서있다.
주모와 함께....
아들은 주모와 인사를 하고...
장돌뱅이 뒤를 따라 기우는 달빛을 받으며 따라갔다.
장돌뱅이는 개울을 만나 짐을 어깨에 메고 정아리를 걷고 물길을 헤치며 건너갔다.
주모 아들도 달빛을 등에 받으며 따라왔다.
뒤를 돌아보다가 미끄러운 돌을 밟아 장돌뱅이는 물 속에 넘어졌다.
"어이쿠,"
주모 아들이 빨리 달려와 일으켜주었다.
절뚝거리며 강을 건너서 숨을 돌리고 다시 일어서려는데 도저히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주막 아들은 등을 내밀고 장돌뱅이는 등에 엎혀서 달빛을 받으며 곰곰히 생각했다.
자신이 주막집 설겆이 하는 처녀와 사랑을 맺고 떠난지 어언 꼭 15년이었다.
그 황홀했던 메밀꽃 속에 사랑을 담았던 출렁이는 꽃향기를 결코 잊지 못했다.
그 뒤로 전국을 떠돌며 장사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하며 자신의 처지를 원망스러웠고,
다른 장돌뱅이에게 소식을 묻고 했었다.
어느날,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숫처녀가 배가 불러 곧 순산할 것이라는...
설마 하고는 아니겠지. 하고 그때부터 잊었던 것이다.
그후로 잊을 만큼 세월이 흘러 봉평장에 오게 되었다. 물론 그 긴 세월 동안에 봉평에 왔어도 임신해서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죄지은 사람마냥 얼씬도 안했던 것이었는데....
어디로 서방따라 다른 곳으로 갔겠지... 하고 안심하고 왔던 것이다.
청년 나이도 15년 .. 장돌뱅이는 주모한테 "주막을 자신이 이어받았다"ㅡ는
말을 듣고 속으로 깜짝놀랐다.
자신 앞에 있는 주모가 그 메밀꽃 속에서 함께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은 그 아가씨란 말인가.
하고.... 어쩐지 낯이 익었던 것이고, 주모도 자신을 뚫어지게 보며 정감가는 눈빛에 웬지 찌르르...
가슴이 저려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 등에 엎혀 개천 물을 헤치는 소리를 들으며서 달을 올려다 보았다.
장돌뱅이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자신을 엎고 있는 청년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여기까지가... "메밀꽃 필 무렵" 줄거리인데... 6년 전에 읽은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메밀꽃 필 무렵 내년 초에도 보고 싶다. 만개한 메밀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