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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형석
2005. 7. 4. 23:11
그 여자는 김전무를 유심히 살펴본 후에 물었다.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남의 것을 함부로 달라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여자는 은근히 거절하고 김전무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도의적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제 말을 들어보면 제가 왜 그 서류가 필요한지 알 것입니다."
김전무는 자신이 사표를 쓰게 된 동기를 대충 말하고 호소를 하였다. 마침내 서류를 받아든 김전무는 눈을 번득이며 읽고는 천정을 올려다 보고 나서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그여자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사례를 하고 나온 김전무는 택시를 타고 남대문에 있는 대진그룹으로 향했다.
남대문에 있는 대진그룹은 화성그룹과 함께 국내 1,2위를 다투는 그룹으로서 1위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홍보는 물론이고 사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있었다.
화성그룹 사원들이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타입이라면 대진그룹 사원들은 회와 양주를 먹는 타입이라고도 할 수가 있었다.
대진그룹은 화성그룹과는 달리 부가가치가 높은 일을 하는 반면에 화성그룹은 중화학공업으로 그룹을 일군 것이기에 스타일이 달랐다.
김전무는 대진그룹 사옥으로 들어갔다. 곧장 엘리베이터를 탄 그는 기획실이 있는 층에 내려 기획실로 향했다.
입구에는 안내하는 여직원이 머리카락을 화려하게 뒤로 빗어 넘기고 김전무를 맞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여직원은 상냥하게 물었다.
"김실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물론 전화를 하고 오는 중입니다."
"아, 김전무님이시죠? 오시면 안내를 하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여직원은 화려한 유니폼을 다 나타내며 앞서서 걸었다. 뒤따라가는 김전무는 여직원의 안내로 복도를 걷는 하이힐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뒤따라갔다.
여직원은 연두색 카페트가 깔려있는 나무로 된 문을 열고는 말했다.
"실장님, 말씀하신 손님이 오셨습니다."
안에는 커다란 쇼파가 있고, 그 뒤에 고동색의 커다란 책상과 회전의자가 눈에 띠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가 있었는데, 안경을 쓰고 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체격이 호리호리한 사람이 일어나 김전무에게 다가와 말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는게... 미스 유 차좀 가져와."
"알겠습니다."
여비서가 나가자 김실장은 김전무와 쇼파에 앉았다.
김실장과는 대학동창으로 그 동안 막역한 사이로 다른 친구 보다도 가깝고 허심탄회하게 지내왔었고 김전무는 자신이 왜 사표를 내게 되었는지 이미 말해놓았고 의논하고 있었다.
김전무는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이 서류인데 내가 읽어보니까 이것 때문에 내가 잘리게 된 이유야."
김전무는 흥분하면서 말했다.
서류를 한참 훑어보던 김실장은 어이가 없는지 멍하니 김전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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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것 그 사람이 작성한게 맞아?"
"응, 틀림없이 그 사람이 작성해서 아마 2년 전에 그 자식한테 갖다 주었을거야. 그래서 비밀을 유지하려고 나를 자른 거야. 그 친구에게 우리가 기획을 작성해보라고 그랬거든."
김전무의 말을 들은 김실장은 말했다.
"두 해 전이라면 이미 개발을 다 끝내고 해외에다 내다 팔고 있을걸? 이미 늦었어."
"그렇겠지. 그럼 왜 그사람을 놔두지?"
김전무는 한숨을 내쉬며 의아해서 물었다.
"일회용이지. 일회용이야! 2년이 흘러서 우리로서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겠는걸."
김전무가 대답이 없자, 김실장은 그 마음을 안다는 듯이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이 선은 뭐지? 그림 같기도 하고 지도 같기도 한데 그 안에 고구려인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그림이 그려져 있군. 그리고 배안에 자동차와 TV가 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가 없는걸. 또한 프리능률제도라? 이것 정말 가능한지 알 수가 없는 걸."
고개를 갸웃거리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김전무는 허탈감에 젖어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야,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되냐?"
풀린 눈으로 김전무는 말했다.
"찾아줘, 그 상품을."
"그래, 종합상사 해외 마케팅 본부장을 만나서 말해보지. 지금 외국에 있는데 곧 오게 될거야. 사장단 회의가 분기별로 있거던."
"그래. 고맙다."
"하여튼 힘을 내. 전화 줄게."
"알았어."
김전무는 대진그룹 사옥을 나와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가 쇼파에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앉는다. 그리고 태평로에 오가는 차량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태호는 화성그룹을 나와서 차를 타고 서초동으로 향하고 있다. 이른 저녁에 양주를 마셔서 그런지 얼굴이 달아 오른다. 손을 뻗어 모아놓은 수필과 시집을 집어든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설희에게 전화를 했다.
"응, 난데 사무실 들어가니까 기다려 줘."
전화를 내려놓고는 눈을 감고 피로를 풀려는 듯이 의자에 깊숙이 상체를 묻었다.
사옥 앞에 도착하자 운전수가 문을 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설희는 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호는 차에서 가지고 내린 시집을 테이블에 놓는다.
설희는 평소대로 태호의 상의를 받아 옷걸이에 걸고는 차를 준비하러 나간다.
태호는 시집을 들어 읽는다. 설희는 차를 가져와서 테이블에 놓고 나가려 하자 태호는 설희의 하얀 손을 잡고 말한다.
"설희, 문을 닫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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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는 시키는대로 나가 문을 닫고 그리고 부회장실 문을 닫는다.
문을 닫지 않아도 퇴근할 시간이 다되어 임원들이 올 리가 없건만 그래도 문을 닫고 와서 쇼파에 앉는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난 태호는 설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한다.
"시를 읽어줄래?"
"시를요?"
여지껏 시를 읽어 달라는 부탁은 있었지만 오전에 읽었지 저녁에 읽어 달라고 한 적은 없었기에 설희는 조금 이상했다. 문을 닫으라는 말에도 조금 놀랐지만 별다르게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집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한다. 설희의 고운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맴돈다.
- 사슴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설희가 잠시 멈추자 태호가 말한다.
그 시도 내가 이따금 읽는 시 인데 그대가 읽으니 더욱 가슴에 와 닿는구나.
계속 읽어다오.
설희는 다음 장으로 눈을 옮겨간다.
진달래 꽃
나 보기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니
드리오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라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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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설희가 다 읽자 태호는 상체를 설희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있다.
마치 베게를 삼듯이...
그리고 안심했다. 설희의 마음이 수긍했음을 알 수 있기에...
설희의 고운 목소리는 붉은 카페트가 깔린 공간에 낭랑하게 울리고 있다.
설희는 자신의 무릎에 누워있는 태호를 내려다 본다. 태호는 눈을 감고 있다.
한 페이지를 넘기는 설희.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두 사람 귀에 들리는 듯 하다.
- 그래도 누이야 -
누이야
아직도 꽃잎같은 세월을
흘러가는 강촌의 흰 조약돌만
만지작 거리며 살고 있느냐
눈썹을 가리우던 산 그림자가
굽이굽이 돌아가는 강물을 지우고
달빛마저 즈믄 밤을 헤우고 나면
별의 가슴에서 울렁거리는
님의 사랑굿만 들으려고 하느냐
그래도 누이야
천년을 두고 별들은 지고
꽃잎마저 다 떨어진다 해도
안개짙은 외로운 뜰에
살포시 내려서 보거라
네가 두고간
영혼의 발자국 소리
지금도 들리고 있느니
설희는 다 읽고서 한 동안 태호를 내려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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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설희가 시를 읽기를 멈추자 눈을 감고 말했다.
"설희, 지금까지 읽은 시는 내가 사모하는 시이기도 하고 그것은 바로 설희에게 향한 나의 마음이기도 해."
태호는 말을 하고는 몸을 돌려 얼굴을 설희의 배로 향했다.
설희는 태호의 말을 듣고만 있다. 태호는 팔을 뻗어 설희의 가냘픈 허리를 감았다.
설희는 마음이 흩으러져 시를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집중해서 또 한 페이지를 넘긴다.
-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
기다리는 님이 오지 않았기에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오지 않았기에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을 누군지 알 것만 같다.
김형영
설희가 시를 읽고 시인의 이름을 조그맣게 말하자 태호는 고백하듯이 말했다.
"설희 나는 나도 모르게 너를 좋아하고 있어. 아니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지."
말을 하고는 설희의 양어깨에 감은 팔에 힘을 주고 자신의 안았다.
"부회장님 아퍼요."
설희는 숨을 헐떡이며 조그맣게 속삭이 듯이 말했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계속 읽어줘"
설희는 다시 시를 읽는다.
- 사랑한다는 말은 -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 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 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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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이해인
설희는 시를 읽고 기쁜 듯이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이 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에요."
"설희 나는 시로 통해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줄 몰라?"
설희는 태호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어머, 몰랐어요."
"마저 읽어봐."
설희는 시를 마저 읽었다.
- 하늘을 바라보며 -
나의 생애가 긴 여로처럼 느낄 때
내 삶이 이 순간으로 끝일라면...
하는 생각으로 옷깃을 여밉니다
삶의 나날에
노오란 개나리가 활짝 핀 들
이끼가 까맣게 낀 터널도 지나가야 하지만
정상을 오르는 등반자처럼
여기저기 한눈 팔지 않고
항상 당신만을 향해 오르겠습니다
언젠가는 꼭 돌아가야 할 내 고향
자주 하늘을 바라보며
내려앉으려는 마음을 드높이겠습니다
파랗게 파랗게 이슬이 방울지듯
맑은 마음으로 희망을 갖고
최선의 삶을 살겠습니다
최남순
설희는 시인의 이름을 마저 읽었다. 그리고 태호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 보았다.
보조개를 살며시 드러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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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다음 장으로 눈을 돌린다.
- 함께 가는 길 -
탐진치로 마음이 요동치고 있을 때,
고요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처진 소나무가 있습니다.
나를 내세울 때
곧게 뻗은 은행나무가 둘 아닌 도리를 일러 줍니다.
오랜 마음의 습기로 한 마음을 잊어버리고 진리를 역행할 때,
이목소의 물은 말없이 낮은 데로 흘러 가고
바위가 있으면 돌아서 가는 법을 가르칩니다.
자신이 아주 초라하게 느껴질 때,
담장에 낀 작은 돌은
당신이 꼭 필요한 존재임을 일깨워 줍니다.
금당의 이끼 낀 기와에서
삶의 깊이와 여유를 배웁니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 임을 깨닫습니다.
만물 만생은 소리 없는 침묵으로,
때론 미소로 때론 울음으로
실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들의 생각에 가득 차서
실상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주고받으며
서로서로 연계되어 살고 있기에
우리들은 그냥 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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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길이 되어
이 끝없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혜룡 (스님)
설희가 다 읽자 태호는 손을 뻗어 설희의 목을 자기에게 당긴다. 설희는 마치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허리를 숙여 얼굴을 태호의 얼굴과 맞닿고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고 태호의 입에서 양주의 향기가 아닌 냄새를 맡게 되었고 그 냄새가 자신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가 몸 속에 퍼져 버리고, 또 붉은 카페트에 자신의 상체를 누이게 되었다.
자신의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고, 가슴은 쉬지않고 뛰고 있었다. 그리고 언니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설희는 언니의 말을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행운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조금도 부끄럼 없이...
태호의 손 끝이 자신의 옷을 하나씩 벗겨 갈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옷을 잡아 당겼지만 태호의 숨소리와 언니와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힘이 빠져감을 느꼈다.
그러자 점차 흥분을 느꼈고 태호의 손이 자신의 상체를 애무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었으며, 마치 취면제 주사를 맞은 것처럼 웬지 몸이 노근해져서
조금도 항거할 수가 없었다. 설희는 태호가 자신의 몸을 유린하게 맡겨 두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그 날 저녁 설희는 태호로부터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상처라는 울타리에 갇혀서 고뇌와 슬픔 속에서 살게 될은 미처 몰랐으리라.
한편 준호는 서류를 보내도 소식이 없어 일 주일이 지난 뒤에 한성사옥을 방문하였으니 설희로부터 조금도 달라진 지시가 없어 마침내 자신이 이용을 당하였거나 아니면 자신의 프로젝트가 무의미로 끝나서 그 동안 시간과 은행 빛을 부회장이 변제해 주기가 싫어서 만나주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한동안 막일과 술로 시간을 보내다 동네에 있는 제일약국 약사 소개로 서초동에서 현철이가 운영하는 서초관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약사와 현철이와는 사촌지간 이었다.
그 때쯤에는 현철과 선경이는 극과 극을 달리듯이 진경은 이혼을 요구하고 있었고 현철은 피하고 옆에 있는 어머니 집에서 잠을 자기도 하며 집에는 들어가지 않는 날도 이따금 있었다.
진경은 현철이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그 이튿날 서초관에 가보니 오준호가 근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준호는 직원으로부터 사모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깍듯이 인사를 하였으며 나이가 자신보다 6살이나 적다는 것을, 그리고 부부싸움을 가게 안에서도 자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초관은 그럭저럭 장사가 잘되어 현철은 그나마 위로가 되었는데, 둘째 아이를 낳은 지가 벌써 1년이 지나가는데 아직까지 진경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하고, 부부간의 사랑을 한 번도 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형들에게 이번에 선산에서 모이게 되면 의논을 하려고 생각했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기 위해 경기도 이천에 있는 선산에 모이기로 했는데, 슈퍼를 하는 큰 하인과 아들, 명문대 무역학과에 다니는 광수, 그리고 오준호도 같이 가게 되었다.
오준호는 현철의 십만평이나 되는 선산에 가서 으리으리하게 꾸며놓은 호화스런 묘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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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남의 것을 함부로 달라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여자는 은근히 거절하고 김전무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도의적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제 말을 들어보면 제가 왜 그 서류가 필요한지 알 것입니다."
김전무는 자신이 사표를 쓰게 된 동기를 대충 말하고 호소를 하였다. 마침내 서류를 받아든 김전무는 눈을 번득이며 읽고는 천정을 올려다 보고 나서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그여자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사례를 하고 나온 김전무는 택시를 타고 남대문에 있는 대진그룹으로 향했다.
남대문에 있는 대진그룹은 화성그룹과 함께 국내 1,2위를 다투는 그룹으로서 1위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홍보는 물론이고 사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있었다.
화성그룹 사원들이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타입이라면 대진그룹 사원들은 회와 양주를 먹는 타입이라고도 할 수가 있었다.
대진그룹은 화성그룹과는 달리 부가가치가 높은 일을 하는 반면에 화성그룹은 중화학공업으로 그룹을 일군 것이기에 스타일이 달랐다.
김전무는 대진그룹 사옥으로 들어갔다. 곧장 엘리베이터를 탄 그는 기획실이 있는 층에 내려 기획실로 향했다.
입구에는 안내하는 여직원이 머리카락을 화려하게 뒤로 빗어 넘기고 김전무를 맞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여직원은 상냥하게 물었다.
"김실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물론 전화를 하고 오는 중입니다."
"아, 김전무님이시죠? 오시면 안내를 하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여직원은 화려한 유니폼을 다 나타내며 앞서서 걸었다. 뒤따라가는 김전무는 여직원의 안내로 복도를 걷는 하이힐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뒤따라갔다.
여직원은 연두색 카페트가 깔려있는 나무로 된 문을 열고는 말했다.
"실장님, 말씀하신 손님이 오셨습니다."
안에는 커다란 쇼파가 있고, 그 뒤에 고동색의 커다란 책상과 회전의자가 눈에 띠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가 있었는데, 안경을 쓰고 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체격이 호리호리한 사람이 일어나 김전무에게 다가와 말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는게... 미스 유 차좀 가져와."
"알겠습니다."
여비서가 나가자 김실장은 김전무와 쇼파에 앉았다.
김실장과는 대학동창으로 그 동안 막역한 사이로 다른 친구 보다도 가깝고 허심탄회하게 지내왔었고 김전무는 자신이 왜 사표를 내게 되었는지 이미 말해놓았고 의논하고 있었다.
김전무는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이 서류인데 내가 읽어보니까 이것 때문에 내가 잘리게 된 이유야."
김전무는 흥분하면서 말했다.
서류를 한참 훑어보던 김실장은 어이가 없는지 멍하니 김전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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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것 그 사람이 작성한게 맞아?"
"응, 틀림없이 그 사람이 작성해서 아마 2년 전에 그 자식한테 갖다 주었을거야. 그래서 비밀을 유지하려고 나를 자른 거야. 그 친구에게 우리가 기획을 작성해보라고 그랬거든."
김전무의 말을 들은 김실장은 말했다.
"두 해 전이라면 이미 개발을 다 끝내고 해외에다 내다 팔고 있을걸? 이미 늦었어."
"그렇겠지. 그럼 왜 그사람을 놔두지?"
김전무는 한숨을 내쉬며 의아해서 물었다.
"일회용이지. 일회용이야! 2년이 흘러서 우리로서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겠는걸."
김전무가 대답이 없자, 김실장은 그 마음을 안다는 듯이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이 선은 뭐지? 그림 같기도 하고 지도 같기도 한데 그 안에 고구려인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그림이 그려져 있군. 그리고 배안에 자동차와 TV가 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가 없는걸. 또한 프리능률제도라? 이것 정말 가능한지 알 수가 없는 걸."
고개를 갸웃거리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김전무는 허탈감에 젖어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야,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되냐?"
풀린 눈으로 김전무는 말했다.
"찾아줘, 그 상품을."
"그래, 종합상사 해외 마케팅 본부장을 만나서 말해보지. 지금 외국에 있는데 곧 오게 될거야. 사장단 회의가 분기별로 있거던."
"그래. 고맙다."
"하여튼 힘을 내. 전화 줄게."
"알았어."
김전무는 대진그룹 사옥을 나와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가 쇼파에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앉는다. 그리고 태평로에 오가는 차량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태호는 화성그룹을 나와서 차를 타고 서초동으로 향하고 있다. 이른 저녁에 양주를 마셔서 그런지 얼굴이 달아 오른다. 손을 뻗어 모아놓은 수필과 시집을 집어든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설희에게 전화를 했다.
"응, 난데 사무실 들어가니까 기다려 줘."
전화를 내려놓고는 눈을 감고 피로를 풀려는 듯이 의자에 깊숙이 상체를 묻었다.
사옥 앞에 도착하자 운전수가 문을 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설희는 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호는 차에서 가지고 내린 시집을 테이블에 놓는다.
설희는 평소대로 태호의 상의를 받아 옷걸이에 걸고는 차를 준비하러 나간다.
태호는 시집을 들어 읽는다. 설희는 차를 가져와서 테이블에 놓고 나가려 하자 태호는 설희의 하얀 손을 잡고 말한다.
"설희, 문을 닫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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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는 시키는대로 나가 문을 닫고 그리고 부회장실 문을 닫는다.
문을 닫지 않아도 퇴근할 시간이 다되어 임원들이 올 리가 없건만 그래도 문을 닫고 와서 쇼파에 앉는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난 태호는 설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한다.
"시를 읽어줄래?"
"시를요?"
여지껏 시를 읽어 달라는 부탁은 있었지만 오전에 읽었지 저녁에 읽어 달라고 한 적은 없었기에 설희는 조금 이상했다. 문을 닫으라는 말에도 조금 놀랐지만 별다르게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집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한다. 설희의 고운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맴돈다.
- 사슴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설희가 잠시 멈추자 태호가 말한다.
그 시도 내가 이따금 읽는 시 인데 그대가 읽으니 더욱 가슴에 와 닿는구나.
계속 읽어다오.
설희는 다음 장으로 눈을 옮겨간다.
진달래 꽃
나 보기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니
드리오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라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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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설희가 다 읽자 태호는 상체를 설희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있다.
마치 베게를 삼듯이...
그리고 안심했다. 설희의 마음이 수긍했음을 알 수 있기에...
설희의 고운 목소리는 붉은 카페트가 깔린 공간에 낭랑하게 울리고 있다.
설희는 자신의 무릎에 누워있는 태호를 내려다 본다. 태호는 눈을 감고 있다.
한 페이지를 넘기는 설희.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두 사람 귀에 들리는 듯 하다.
- 그래도 누이야 -
누이야
아직도 꽃잎같은 세월을
흘러가는 강촌의 흰 조약돌만
만지작 거리며 살고 있느냐
눈썹을 가리우던 산 그림자가
굽이굽이 돌아가는 강물을 지우고
달빛마저 즈믄 밤을 헤우고 나면
별의 가슴에서 울렁거리는
님의 사랑굿만 들으려고 하느냐
그래도 누이야
천년을 두고 별들은 지고
꽃잎마저 다 떨어진다 해도
안개짙은 외로운 뜰에
살포시 내려서 보거라
네가 두고간
영혼의 발자국 소리
지금도 들리고 있느니
설희는 다 읽고서 한 동안 태호를 내려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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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설희가 시를 읽기를 멈추자 눈을 감고 말했다.
"설희, 지금까지 읽은 시는 내가 사모하는 시이기도 하고 그것은 바로 설희에게 향한 나의 마음이기도 해."
태호는 말을 하고는 몸을 돌려 얼굴을 설희의 배로 향했다.
설희는 태호의 말을 듣고만 있다. 태호는 팔을 뻗어 설희의 가냘픈 허리를 감았다.
설희는 마음이 흩으러져 시를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집중해서 또 한 페이지를 넘긴다.
-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
기다리는 님이 오지 않았기에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오지 않았기에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을 누군지 알 것만 같다.
김형영
설희가 시를 읽고 시인의 이름을 조그맣게 말하자 태호는 고백하듯이 말했다.
"설희 나는 나도 모르게 너를 좋아하고 있어. 아니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지."
말을 하고는 설희의 양어깨에 감은 팔에 힘을 주고 자신의 안았다.
"부회장님 아퍼요."
설희는 숨을 헐떡이며 조그맣게 속삭이 듯이 말했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계속 읽어줘"
설희는 다시 시를 읽는다.
- 사랑한다는 말은 -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 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 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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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이해인
설희는 시를 읽고 기쁜 듯이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이 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에요."
"설희 나는 시로 통해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줄 몰라?"
설희는 태호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어머, 몰랐어요."
"마저 읽어봐."
설희는 시를 마저 읽었다.
- 하늘을 바라보며 -
나의 생애가 긴 여로처럼 느낄 때
내 삶이 이 순간으로 끝일라면...
하는 생각으로 옷깃을 여밉니다
삶의 나날에
노오란 개나리가 활짝 핀 들
이끼가 까맣게 낀 터널도 지나가야 하지만
정상을 오르는 등반자처럼
여기저기 한눈 팔지 않고
항상 당신만을 향해 오르겠습니다
언젠가는 꼭 돌아가야 할 내 고향
자주 하늘을 바라보며
내려앉으려는 마음을 드높이겠습니다
파랗게 파랗게 이슬이 방울지듯
맑은 마음으로 희망을 갖고
최선의 삶을 살겠습니다
최남순
설희는 시인의 이름을 마저 읽었다. 그리고 태호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 보았다.
보조개를 살며시 드러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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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다음 장으로 눈을 돌린다.
- 함께 가는 길 -
탐진치로 마음이 요동치고 있을 때,
고요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처진 소나무가 있습니다.
나를 내세울 때
곧게 뻗은 은행나무가 둘 아닌 도리를 일러 줍니다.
오랜 마음의 습기로 한 마음을 잊어버리고 진리를 역행할 때,
이목소의 물은 말없이 낮은 데로 흘러 가고
바위가 있으면 돌아서 가는 법을 가르칩니다.
자신이 아주 초라하게 느껴질 때,
담장에 낀 작은 돌은
당신이 꼭 필요한 존재임을 일깨워 줍니다.
금당의 이끼 낀 기와에서
삶의 깊이와 여유를 배웁니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 임을 깨닫습니다.
만물 만생은 소리 없는 침묵으로,
때론 미소로 때론 울음으로
실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들의 생각에 가득 차서
실상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주고받으며
서로서로 연계되어 살고 있기에
우리들은 그냥 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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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길이 되어
이 끝없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혜룡 (스님)
설희가 다 읽자 태호는 손을 뻗어 설희의 목을 자기에게 당긴다. 설희는 마치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허리를 숙여 얼굴을 태호의 얼굴과 맞닿고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고 태호의 입에서 양주의 향기가 아닌 냄새를 맡게 되었고 그 냄새가 자신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가 몸 속에 퍼져 버리고, 또 붉은 카페트에 자신의 상체를 누이게 되었다.
자신의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고, 가슴은 쉬지않고 뛰고 있었다. 그리고 언니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설희는 언니의 말을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행운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조금도 부끄럼 없이...
태호의 손 끝이 자신의 옷을 하나씩 벗겨 갈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옷을 잡아 당겼지만 태호의 숨소리와 언니와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힘이 빠져감을 느꼈다.
그러자 점차 흥분을 느꼈고 태호의 손이 자신의 상체를 애무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었으며, 마치 취면제 주사를 맞은 것처럼 웬지 몸이 노근해져서
조금도 항거할 수가 없었다. 설희는 태호가 자신의 몸을 유린하게 맡겨 두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그 날 저녁 설희는 태호로부터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상처라는 울타리에 갇혀서 고뇌와 슬픔 속에서 살게 될은 미처 몰랐으리라.
한편 준호는 서류를 보내도 소식이 없어 일 주일이 지난 뒤에 한성사옥을 방문하였으니 설희로부터 조금도 달라진 지시가 없어 마침내 자신이 이용을 당하였거나 아니면 자신의 프로젝트가 무의미로 끝나서 그 동안 시간과 은행 빛을 부회장이 변제해 주기가 싫어서 만나주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한동안 막일과 술로 시간을 보내다 동네에 있는 제일약국 약사 소개로 서초동에서 현철이가 운영하는 서초관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약사와 현철이와는 사촌지간 이었다.
그 때쯤에는 현철과 선경이는 극과 극을 달리듯이 진경은 이혼을 요구하고 있었고 현철은 피하고 옆에 있는 어머니 집에서 잠을 자기도 하며 집에는 들어가지 않는 날도 이따금 있었다.
진경은 현철이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그 이튿날 서초관에 가보니 오준호가 근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준호는 직원으로부터 사모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깍듯이 인사를 하였으며 나이가 자신보다 6살이나 적다는 것을, 그리고 부부싸움을 가게 안에서도 자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초관은 그럭저럭 장사가 잘되어 현철은 그나마 위로가 되었는데, 둘째 아이를 낳은 지가 벌써 1년이 지나가는데 아직까지 진경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하고, 부부간의 사랑을 한 번도 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형들에게 이번에 선산에서 모이게 되면 의논을 하려고 생각했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기 위해 경기도 이천에 있는 선산에 모이기로 했는데, 슈퍼를 하는 큰 하인과 아들, 명문대 무역학과에 다니는 광수, 그리고 오준호도 같이 가게 되었다.
오준호는 현철의 십만평이나 되는 선산에 가서 으리으리하게 꾸며놓은 호화스런 묘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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