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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꽃잎이 모여서 1~4

방형석 2005. 7. 4. 19:10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반도는 늘 강대국으로부터 위협과 압박 속에 시달려 왔고, 이웃 일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반도는 늘 강대국으로부터 위협과 압박 속에 시달려 왔고, 이웃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더 나아가서는 문화까지 위협을 받으며 36년이라는 기나긴 기간을 식민지 통치라는 치욕을 받아야 했다.

좀더 거슬러올라가면 중국으로 끓임없는 침입으로 국가는 국력쇠약이라는 병에서 헤어나지 못했는데도 강대국들은 서로 연합해서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려오고 있었다는 데에 우리는 참으로 불행한 지리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데에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 충성과 전술로서 대국의 침입을 번번히 막아왔었지만 결국에는 이웃나라인 일본의 간교하고 집요한 침략에 우매한 임금을 비롯하여 간신배들은 이 나라를 일본이 통치를 하도록 내주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후에도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권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자본을 수입하기에 혈안이었지 우리의 문화가 가슴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끈이 끓어지게 한것은 커다란 정책 실패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나라의 문화는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첨단 무기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현대이지만 문화야 말로 그 나라의 국민을 하나로
일치단결할 수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첨단 무기로도 제압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국민과 통치권자가 하나가 되는 것인데 그 일치단결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수많은 외침으로부터 굳굳히 지켜나가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문화라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에서 하나로 일치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기에 첨단무기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문화를 계승하고 보다 더 승화시켜 나갈 해법을 국민 모두에게 제시하지 않고 또 가슴 속에 심어주지 않고 있다는 것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조국이 반 토막으로 갈라질 무렵에도 그후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갔고 흘러왔다.
그것은 마치 한강물이 유유히 흘러가듯이 지나온 것과 같다.

어디 6,25 전쟁 때만 그랬으랴만은 한강은 쓰라린 역사 같은 데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지금도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미래에도 변함 없을 것이다.

해방후 성한 건물이 하나도 남김없이 페허가 되버린 이 나라를 재건하겠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기성세대들은 지나온 긴 세월중에서도 근래에 이르러 십여년을 쉬지 않고 오직 잘 살아보세 라는 일념으로 쉬지 않고 허리가 휘도록 일만 하고 또 달려왔던 것이다.

수십년을 오랜 독재에서 벗어나는 가 했더니 권력의 독재와 부패는 결국 파멸을 불러 왔으며 대통령이 부하의 총탄에 맞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불행한 역사의 한 장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군부가 탄생하였지만 결국 그 정권도 부정축재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국민들은 참 불행했다. 뛰어난 지도자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불행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그 몫은 서민들의 고통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겠는가.
군부정권이 지나고 맞는 봄은 국민들에게 기대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1




강남 개발로 인해 밭과 논으로 생활을 해나가던 농민들은 가지고 있는 땅들로 인해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되었다.
갑자기 부자가 되리자 그 많은 돈을 은행과 사채로 재산을 불리기만 하던 졸부들은 자식들에게 땀을 흘려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보다는 자식 사랑을 외제차와 호화사치품으로 사랑을 표현하였다.

그결과 거리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외제차는 물론 벤츠, BMW, 도요다,사브,볼보, 폴스바겐, 자동차가 눈에 띠게 거리를 누비고 있었고 한대에 수 천만원하는 오토바이까지 가세해 거리는 굉음을 울리고 다녀 시민들을 알게 모르게 일하는 의욕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은 잠자고 있는지 무방비 상태로 방임하고 있다. 그 반면에 기업들은 중동시장에 진출하여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파견된 근로자들은 수년을 근무하고 돌아오면 집을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땀을 흘리던 시대도 있었다.

개중에는 남편이 중동에 가서 섭씨 40도가 넘는 곳에서 고국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그리며 달력을 손꼽아 보고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지만 한편 바람난 여자는 카바레에 맛을 들여 남편이 송금하는 돈을 제비와 함께 소비하는 사례가 심문에 종종 나기도 하던 시대도 어느새 훌쩍 지나가고 어느덧 달력은 90년대를 넘어섰다.

약속 시간이 되어갈수록 고여사는 가슴이 설레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아침을 맞기위해 기나긴 밤을 뜬눈으로 새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남편을 잃고 나서 긴 밤을 남편을 그리다가 새벽을 맞이 하였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잠을 자려고 하여도 웬일인지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인데 마치 필름이 멈추지 않고 밤새도록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꼬박 밤을 새워 영화를 본 것만 같았다.
십여년이 지나도록 오직 자식만 바라보고 뒷바라지를 해왔던 것인데 이제 고생이 끝나는
듯하여 지나온 과거가 아련히 떠올라 그 긴 세월을 어떻게 참고 견뎌 왔는지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세수를 하고 화장대에 앉아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얼굴을 수건으로 닦고는 말았던 것인데, 오랜만에 거울을 들여다 보니 이마에는 주름살이 어느새 새겨지고 눈가에는 잔 주름이 깊게 잡혀 있었으며 뺨에는 기미로 인해 검은 점이 군데 군데 생겨나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흉하게 보여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피부가 변했는지는 고여사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갸르스름하고 도톰하게 탄력있었던 얼굴은 지나온 긴 세월속에 외로움과 생활에 시달려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있었고, 피부도 쪼글쪼글해진 것 같아 마음이 더욱 쓰렸다.
이따금 혼자 있을 때 원망스런 표정으로 한없이 바라보던 것처럼 남편의 사진을 다시 올려다 보았다. 볼 때마다 남편의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던 해를 떠올리게 되었다.

벽에 걸린 사진속의 얼굴은 고여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젊었고, 마치 갓 결혼한 신랑처럼 싱그러움 마저 들었고, 그럴 때마다 고여사는 자신만이 늙어감에 남편이 야속했다.
야속함이야 어디 이루 말할 수야 있겠냐 만은 표정없이 내려다 보는 그 모습에는 타인의 초상화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볼 때마다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당연한 순서처럼 보게 되었고 이제는 습관이 되어 올려다 보면,
남편의 얼굴은 너무도 젊었기에 저 사람이 과연 나의 남편이었던가 하는 의구심 마저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흔히 매일 나오는 뉴스 중 하나가 바로 교통사고였고, 차가 많다보니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 불행한 운명이 바로 자신에게 찾아 올 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이후에 오는 휴우증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사망 소식에 믿기지 않아 확인하러 가는 도중 제발 다른 사람 이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갔었으나, 그것은 요행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와 시신위에 그만 엎어져 한없이 울부짖었던 것이 마치 어제 같았다.

관을 땅속에 묻어야 할 때 이제는 남편의 모습마저 다시는 보지못할 것을 생각하니 그대로 떠나 보내게 할 수가 없어 땅 속에 묻는 관을 따라 뛰어들려는 나를 붙잡던 사람들을 지금도 누군지를 모르고 있다.
울부짖는 나를 보며 덩달아 따라우는 아이들을 껴앉고 절망감에 사로 잡혔던 기억이 떠 올랐다.

2



고여사는 남편의 사진을 올려다 보다가 다시 거울을 바라다보았다.
화장을 중단하고 장롱에 새겨진 양각의 원앙의 새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는 한 숨을 자기도 모르게 내쉬고 말았다.

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일어나 옷장으로 다가가 장롱문을 열고 촘촘히 걸려있는 옷들을 보았다. 농 속에는 신혼시절에 입었던 옷가지들이 옷걸이에 걸려 총총히 장롱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남편의 옷은 하나도 없다. 모두들 가버린 사람의 유품은 남겨 두는게 아니라고 했다. 한 두개라도 보관하고 싶었지만, 주위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지나는 엿장수에게 주고, 고물상에다 전화해서 가져가라고 했다.

결혼을 해서 전세방 하나를 얻고 첫애인 경일이를 갖고서 나도 아이를 낫는구나 하고 생각되자 어머니가 생각났던 것인데...

수건을 들고 밖으로 나가 물에 적셔 가지고 물기를 빼고는 들어와서는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내려 먼지를 닦았다. 혼자 사는데도 먼지는 어김없이 내려 앉았고, 고여사는 늘 남편의 사진에 먼지가 앉는 것이 싫어 자주 사진을 내려서 무릎에 얹어 먼지를 닦었다.
닦여진 사진은 젊었을 때의 남편의 모습이 보다 뚜렷해져서 고여사를 마주보고 있었으며 눈이 큰 남편은 사각형인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으며, 연애시절에는 무슨 남자가 눈이 그렇게 크냐고 이따금 묻곤 했던 것인데 그럴때마다 그는 나에게 웃으며 말하곤 했었다.
" 나의 큰 눈이 자기의 눈이라면 자기는 매력이 넘쳐 많은 남자들이 아마 줄서서 따라 다녔 을 거야. "그러면 나는, "그래도 나는 당신만을 사랑했을거야." 하고 말한 기억을 떠올렸다.

결혼사진을 보면서 고여사는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ㅡ 어쩜, 이렇게 경직되어 있을까? 미소라도 띠웠으면.ㅡ
다시 한 숨을 내쉬며 잃어버린 세월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벽에 걸어 놓고 올려다
보았다.
잠을 자다가 평소처럼 팔을 뻗어 보지만 허공을 젓는 느낌에 섬뜩 잠을 깬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그럴때마다 남편의 가슴에 안겨서 맡았던 뜨거운 숨결이 그리웠으며, 포근한 숲처럼 느껴왔던 가슴에 다시는 안길 수가 없다는 사실에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하고 그리움으로 밤을 새야했었다.
방안에 갇힌 어둠은 정적과 함께 그리움과 고독으로 더욱 짓누르고 있는 듯해서 고여사는
불을 켜고 아이들이 자는 방으로 가서 살며시 문을 열어보고는 세상모르게 자는 평온한 모습에 안심하고 마루에 앉아서 밤하늘을 비추는 달을 보면서 토끼가 떡방아를 찌는 모습을 그리면서 어렸던 자신의 추억으로 달려가곤 했다.

아침이 밝아오면 아버지가 없다는 현실에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울어대던 아이들을 달래는 것도 이제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얘들은 책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서지만 큰 아이의 어깨에는 힘이 없고 작은 아이에게서도
명랑함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을 볼 때에 고여사는 마음이 쓰렸다.
오늘도 웬지 걱정이되는 것은 남편이 이 세상에 없다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이지만,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아이들마저 사고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에서였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예전처럼 대문을 요란하게 열고 들어오지 않을 때는 아버지


3



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우울함에 젖어 있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알아도 고여사는
아이들을 야단칠 수가 없었다.
걱정이 되어 화를 내보지만 아이들의 풀 죽은 모습을 보면 애처로와 함께 껴안고는 말할 뿐이었다.
" 그래, 공부 못해도 괜찮다. 사고를 당하지 말고 건강하게 커다오. 얘들아! "
그 후부터 고여사는 얘들한테 공부에 대한 말은 하지않고, 남에게 절대로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없는데도 명랑하게 성장해 갈수록 고여사는 사랑스러웠으며, 엄마를 걱정 할 때면 너무도 고마웠다.
어른스러워지고 숙녀같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면 대견스러웠다. 매일 기나긴 밤을 홀로 세워야하는 반복되는 고통과 남편과 사랑놀이의 즐거움을 갖지 못하며 살아왔지만, 오직 자식들의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보면, 삷의 보람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나라의 부름으로 사랑하는 부인과 자식들 그리고 부모형제를 이별하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여야 했던 호국 영령들의 거룩한 뜻을 되새기면서 남겨진 원호가족들의
슬픔을 생각하면, 고여사는 자신을 위로 받던 것인데, 젊음을 나라를 위해 피로서 이 나라를 지켜야 했던 원호가족의 처연함에 비하면, 자신의 슬픔은 작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작동 국립묘지 비석 앞에 차례를 차려놓고 아이와 함께 흐느껴 오열하는 미망인의 슬픔을 보면 자신도 눈시울이 붉어져 눈물이 절로 나오고, 화면을 통해 전해오는 소리없는 흐느낌은 자신의 가슴이 울리는 것을 느끼고는 저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파란 잔디 위에 하얀 소복을 입고 오열하는 미망인의 흐느낌은 자신만의 슬픔이 아니기에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억제하는 것이리라. 한 번 가면 다시는 오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나라의 명령에 따라 저 세상으로 가버린 남편을 원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자식을 보고 싶어서만은 아닐 것이며, 언제까지나 고독으로 살아야 하는 며느리와 손주들의 긴 세월 만을 원망하는 것은 또한 아닐 것이고, 자식에게 아비없는 설움을 평생 안겨주어야하는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고여사는 잘 알고 있다.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도 슬프건만, 어떻게 아이들과 그리고 시부모를 모시고 험난한 세월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 더욱 서러울 것이기에...
부모로서 자식을 다른 아이들 못지 않게 가르쳐야 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더욱 흐느낌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라고 고여사는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이 과부가 되어 재혼이라는 운명의 슬픈 갈림길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 너무도 기가막히고 서럽기 때문일 것이었다.

아이는 엄마가 슬피우는 모습에 영문도 모르고 엄마 치마를 잡고 덩달아 우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고여사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비석을 잡고 가슴을 쥐어짜듯이 우는 노모의 슬픔에는 어찌 자식을 잃은 슬픔만 일까. 생활에 찌들리고, 자식을 잃은 슬픔만도 국가가 원망스러운데, 명예로운 죽음에 대한 남겨진 유족의 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이 나라가 너무도 원망스러워 노모의 울음은, 곧 국가에 대한 사무치는 한 바로 그것 이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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