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제주도 섬 둘레 곳곳에 천주교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제주도 섬 도민 과반수가 천주교 신자라고 할 만큼 많았다.
필자는 ...
혈혈단신으로 부인과 아이를 동행하여 무속으로 가득찬
척박한 제주도에 100여년 전, 신앙을 심고자 뛰어들었던
한 사람의 목사를 취재하였다.
백년 전의 제주도 모습은 어땠을까.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제주도는 당시에 죽음의 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리라.
삼다도.
돌,해녀,바람 밖에 보이지 않는 제주는 황량함과 삭막함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하나님 사업을 위해 배를 타고 바다 건너오기도 힘들었으리라.
풍랑을 만나면 선교하기도 전에 바다에 물귀신이 될 것을 무릅쓰고 건너왔다.
= = = = =
천주교 사제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수녀 또한 그렇다.
그것은...곧 하느님과 결혼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느님 미션을 위해서 몸을 던지는 것은 혼자이기에 더 쉽지 않을까.
목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가정을 갖고 있다.
가정을 이끌기 위해서는 집과 아내와 자녀를 부양한다.
사랑스런 가정을 모두 이끌고 미지의 세계로 가서 무속신앙으로 가득찬
제주에 오늘날 성안교회가 자리해 많은 사람들이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난으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천주교인 1만여명을 참수한 이후에
태어난 이목사는 제주도로 선교를 하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데리고, 미지의
세계 향하는 작은 배에 가족을 싣고 바다를 건널 때의 마음은 어땠을까.
뜻을 이루는 여정에 배가 침몰이라도 한다면...
피와 살로 형성된 인간인 이상 그러한 불안감이 없었을까...
당시 이목사의 젊은 가족이다.
부인도 남쪽 끝에 있는 황무지 섬에 복음을 펼치러 가는 사업에 뒷바라지 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긴 세월을.....
건축기법이라야 바닥에 돌을 놓고 나무를 깎아 사각모양으로 만들어 세워
대들보나무를 위에 얹고 판자를 수놓아 기와을 얹는 것이 전부였으리라.
사만이...
사만이는 저승사자가 오는 길목에 떡벌어진 각종 귀한 음식을 차려놓았다.
저승사자는 먼길을 달려온 터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음식을 먹었다.
당시 사만이는 37세였다.
맛있게 먹은 저승사자는 저승명부에 사만이를 3천년으로 고쳐주었다.
그 후 사만이는 3천년을 살았다. ... 무속신화이다.
이기풍목사의 소망대로 하나님 사업에 주춧돌이 된 성안교회 전경
이기풍목사 기념관
고대에는 뱀을 모신 부족이 많았다.
지혜와 풍요를 가져다 준다는 신뢰에서 시작된 무속신화는 당시 제주에도 뱀을
섬기는 무신들이 많았다.
인간으로서 오래 살고자 하는 소박한 신화에서 기원한다
벽에 새겨진 여인이 뱀 다섯마리를 머리 위에 얹고 있는 그림도 있다.
지금도 제주 곳곳에서 무당들이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굿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필자도...
어린 시절 서울 면목동에서 성장할 때, 이웃들이 무신을 불러다 굿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인간은 풍요 속에서 오래 살고자 하는 평범하고 소박한 기원에서
시작됐지만...
많은 종교 규율을 지키는 현대인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발이, 심승할망 등은 여신으로 신선이다.
신들은 자신의 한스러움에 귀를 기울여준다는 믿음이다.
바람, 돌,파도 만이 이루어진 척박한 제주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소박한 자연의 믿음이 필요했으리라.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기독교 선교 100여년이 지난 지금...
제주는 특별자치도로 지정돼서 중앙정부의 지원아래 국제자유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휴가철을 맞아 제주를 찾은 피서인들은 제주도가 육지의 해수욕장처럼 발디딜
틈조차 없을 만큼 피서객들로 가득차지 않고, 조용하고 한적함을 만끽했을 것이다.
제주도 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바다는 3색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에 검푸른 색으로 수평선으로 펼쳐져 있고, 파란색과 코발트색으로
펼쳐져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무속으로 가득했던 당시에도 바다는 코발트 색을 띄며 삼색<三色>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