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형석 2009. 10. 26. 20:35

 

 추색이 만연한 서울 관악산.

단풍이 곱게 물들기는 서울의 산들도 매한가지이다.

 멀리서 관악산 연주대를 당겨 촬영했지만,거리가 멀어 선명하게 나오지 않았다.

안개로 인해 북한산과 관악산을 가로지르는 한강,남산이 시야에 희미했다.

 저 멀리 관악산 정상이 보인다. 왼쪽이 깎아놓은 듯한 절벽 위에 연주대가... !

 시야에 들어온 연주대를 담았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산 아래 자리잡고 있다.

서울대 3학년부터 외무고시 공부하던 친구녀석 3번을 낙방하고 포기하려고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읽을 만한 책을 달라고 해서 일본기업소설을 책방에서 빌려서 갖다 주기도했다.

영화 성룡의 주연 "취권" , 프랑스 영화 "남과여"를 을지로와 충무로를 다니면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탈락의 쓰라림을 함께 보내며 술마시기도 했다.

 

여자에 마음쏠리는 것을 고시라는 명예의 첫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청년기를 참고 견디면서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떨어져 삐쩍마른 얼굴과 두터운 안경을 쓰고 있던 친구는 허탈해했다.

그친구는 말했다.

 "과목별 점수를 살펴보니까 형편없더라. 특히 외국어가..."

자조하듯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토록 연습에 연습을 했지만, 왜 외국어에서 낙방했을까.

경제학이 어려웠다고 했지만 합격선에 점수가 나왔다고 했다.

 

영작은 좋아하는 학문을 넘어 시대의 요청에 의한 이치를 깨우쳐야 하는 것이라는 표현이었는지도 몰랐다.

어휘가 나타내고 있는 것을 적합하게 문구에 사용해야 하는 것은, 단순함을 넘어서 어휘확보 만이 포인트는 아니였는지도 모른다.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자부심으로 최고의 교수를 포진하고 있는 서울대학교의 자신감은, 잇달은 탈락의 고배로 학문의 깊고 고달픔을 알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봐라.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내려다봐도 나는 100%

최선을 다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래도 떨어지면 깨끗이 잊고 사회로 뛰어들어 일하면 휴우증이 없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래야 만이 후회와 미련없는 삶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며,그래야 만이 사회에서

과거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으로 인한 나약함에 젖지않고 일할 수 있다고 강도깊게 말했던 것이다.

 

<지인사 대천명> 이라고 조언을 하고, 그후 일년 가까이 보지 못했고, 등산도 함께

가지 못해서 이따금 전화를 하면, 그 형수는 도시락 2개를 싸서 가방에 넣어준다고

했다.

아침 9시에 집을 나가면 저녁 8시 다돼서야 들어온다고 했다. 그 해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봄이었던가.

전화를 걸어서 2차 시험 결과를 그 형수에게 물었다.

그 친구 형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흥분한 어조로...

 "붙었어요.!"

가슴에 벅차올라 외쳤다. 마치 자신의 아들이 고시를 패스한 것처럼...

4번째 외무고시 패스했을 때, 그 기쁨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곧 장가들었다. 녀석 전화도 없었다. 결혼한다고 와서 축하해달라고...

 

혼자인 시어머니 모시고, 시동생 고시공부 뒷바라지하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야하고 아이들 교육까지 시켜야하는 그형수는, 마치 자식이 고시에 합격한 것같은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그후 그 친구는 좀처럼 만나서 옛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다.

지금은 대사로 뉴욕에 근무하고 있는데...

 

외교통상부에서 과천종합청사로 파견나와 환경부에 3년 동안 있을 때, 딱 한번

찾아갔더니  음료수만 마시고, 술한잔하는 회포를 풀지 못했다.

이처럼 친구 사이에도 차이가 너무 나면 우정을 나누기도 힘든 것이 세상사이다.

경제협력과장으로 발령났을 때, 청사 옆 지하상가 참치회집에서 매실주 설중매를 마신 적이 생각난다.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어쩌면 사실을 숨기고 포장했다면...카다로그를 구해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친구 홀어머니가 생각나서 ...!

혹시 카다로그를 가져왔던 가지고 오지 않았던 나는 우정의 친구에게 조금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귀국할 때, 독일은 유럽의 강대국이다. 당연히 통관을 했을 것이고 카다로그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당시 그 친구가 독일대사관 일등서기관을 마치고 귀국할 때는 ,IMF 時代 맞아

국가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나는 제주도로 내려가 있었고, 핸펀으로 대사관으로 전화해서 부탁을 했지만...

결국 녀석은 회피했다.

 

그러리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분쟁에 휘둘리면서 자신의 양복에 흙탕물이

튀는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후에도 몇번 부탁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어쩌면...

그런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오늘 대사로 근무하고 있는 것이리라.

 

 

  연주대 뒤에서 보니 바위는...

왕의 묘에서 풍우를 맞으며 기나긴 세월을 지키며 서있는 석상<石象>같았다.

또, 제주도 상징물인 <하루방>을 옆에서 보면, 느끼게하는 형상이다.

 

세월은 벌써 25년 지나갔다. 그 친구와 함께 관악산을 오르던 추억이 기억났다.

그래서 나는 관악산을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사당역에서 관악산 연주대를 오르는 코스는 제법 힘들다. 바위를 잡고 가파른

능선을 오르면 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 15년 동안 과연 관악산을 몇 번이나 올랐을까.

세어보면 아마도 10번도 되지 않음직하다.

 秋色이 가득한 황홀한 색으로 연출한 가을은, 연주암을  보는 사람들에게 가을의

정취에 흠뻑 매료되어 삶의 기쁨을 만추<滿秋>에서 얻었다.

 관악산의 명소 연주대

 

 억새와 단풍.

억새는 슬프다. 단풍의 황홀함을 보면...  슬퍼마라. 우지마라.

인생의 삶도 잠시일뿐... 영원하지 않다.

사람의 삶은 80년 평생이라지만. 지나고 나면 억새와 단풍처럼 휙! 지나가서

다시 오지 않는 것은 같다.

단풍과 억새는 내년을 기약할 수 있지만, 우리 인간은 또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내세<來世>에 약속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를  벗어날 수 없는 동물인지도 모른다.

 과천역으로 내려와 보니 아파트 앞 나무들이 자연의 색을 연출했다.